시험 기간이구나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다수는 아마 고등학교 시험 기간 중에 컴퓨터 전문 서적을 맹렬히 읽고 싶은 열망을 누르기 어려웠던 적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러면서 우린 상상을 했다. "아, 컴퓨터에 대해 시험 공부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사람들이 대학에 들어가 컴퓨터 전공을 하면 시험 기간 중에 컴퓨터 책이 아닌 또 다른 주제를 공부하고 싶어진다(내가 그랬다). 내가 아는 뛰어난 프로그래머 몇 명은 시험 기간만 되면 재미난 프로그램을 하나씩 만든다(물론 시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프로그램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가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면 "아, 요즘 시험 기간인가 보구나"하고 추측한다.
꿈의 직장, 그리고 현실
우리는 항상 부러워하는 회사가 한 둘은 있다. 돈을 많이 주기도 하고, 좀 더 수평적이기도 하고, 야근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개인 프로젝트 시간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 식사가 맛있어서이기도 하다.
신문에서, TV에서, 블로그에서 그 회사가 소개되면 점심 시간에 남몰래 그 자료를 꼼꼼히 읽으며 마음 속으로 외친다. ‘아, 나도 저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 그러고는 퇴근 이후 친구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며 회사에 대한 불평을 안주 삼는다. "우리 팀장은 말이야...", "우리 사장은 말이야...", "우리 회사는 말이야..." 몇 시간을 그렇게 불평하다가 집에 돌아가 자고 나서 일어나면 다시 그 불만스러운 회사로 출근한다.
필자는 여러 개발자를 보아왔다. 많은 개발자가 현재 환경이 열악하다고 생각한다(정말 그렇다). 그리고 동경하는 직장이 한 둘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중 일부에게서 어떤 패턴을 지속적으로 발견했다.
- 그 사람들은 계속 현재 상황이 문제라고 생각하며 불평을 반복하고
- 그 상황을 개선하는 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며
- 자신은 다른 직장에 가야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믿으며
- 따라서 현 직장에서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 사람들이 스스로 그렇게도 불만스러워 하는 그 직장이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동경의 직장인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이고, 게다가 자신이 동경하는 직장으로 옮겨도 거기에서 또 다시 불평을 하면서 다른 직장을 동경한다는 점이다.
파랑새를 찾아
나는 이런 현상을 파랑새 신드롬이라고 부른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모리스 마테를링크는 『파랑새』를 지었다. 많은 사람이 이 『파랑새』를 동화나 TV 만화 형태로 접했다. 띨띨(Tyltyl, 치르치르)과 뮈띨(Mytyl, 미치르)이라는 아이들이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아 긴 여행을 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기 집 새장 속의 새가 파랑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다(그 뒤에도 이야기가 있고, 나름 중요한 메세지를 전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파랑새 직장을 찾는다. 하지만 그냥 상상해 보자. 내 파랑새 직장이 내가 이미 퇴사한 직장 중 하나라면(실제로 내가 예전에 퇴사한 회사를 동경해 입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혹은, 현 직장이 내 파랑새 직장이라면?
만성 파랑새 신드롬에 걸린 사람들은 항상 불행하다. 언제나 파랑새는 내가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파랑새가 있는 쪽을 동경한다. 그러면서 현재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핑계거리가 많다. 그러다가 자리를 옮기면 파랑새는 여기에도 없다.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상하네. 여기에는 파랑새가 있을 줄 알았는데. 도돌이표.
직장을 바꾸거나 직장을 바꾸거나
마틴 파울러(Martin Fowler)가 재미있는 조언을 했다.
직장을 바꾸거나 직장을 바꾸거나.
동어 반복 같다. 그러면 멍청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 말은 꽤나 현명한 조언이다. ‘바꾸다’라는 말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는 점을 재치있게 이용했다.
첫 번째 "바꾸거나"는 자신의 현 직장을 변화시키라는 뜻이고, 두 번째 "바꾸거나"는 그래도 안 되면 직장을 옮기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순서다. 우선 직장을 변화시켜 보고, 안 되면 직장을 옮기라는 것이다. 그냥 직장부터 옮겨보라는 조언이 아니다. 하지만 파랑새 신드롬에 걸린 사람들은 앞 부분이 없다. 그래서 가까운 파랑새를 발견하거나 자기 집 안에서 만들어내지 못한다.
파랑새 직장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직장을 고르느냐 이상으로 내가 그 직장에서 어떻게 일하는지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여기 저기를 옮겨다니며 불평한다. 왜 세상에는 내가 바라는 좋은 직장이 없냐고. 그런 사람은 설사 자기가 직장을 만들더라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치명적 질문
애자일 컨설팅은 기업 대상으로 구인 과정을 컨설팅해 주기도 한다. 성공하는 프로젝트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하나둘 챙겨넣다 보니 결국은 "적합한 사람을 애초에 뽑았어야 했다"라는 후회에 도달해서 구인 프로세스도 포함했다. 내가 스스로 사람을 뽑거나, 다른 회사를 위해 사람을 뽑아주거나, 조언해 주는 입장에서 항상 중요하게 여기는 질문이 있다. 이직을 계획하는 사람에게 면접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지난 직장에서 가장 불만스러웠던 점이 무엇인가요?" 여기는 쉬운 부분이다. 핵심은 두 번째 질문이다. "그럼 그걸 개선하기 위해 어떤 구체적 노력을 하셨나요?"
중요한 것은 그 노력이 성공했냐 못했냐가 아니다. 물론 성공까지 했으면 좋겠지만 그런 사람이 왜 굳이 이직을 하려 할까. 정말 중요한 것은 노력을 했냐 안 했냐 하는 것이다. 불만스러웠지만 정말 아무 노력도 안 한 사람이라면 파랑새 신드롬에 걸린 사람일 확률이 있다. 약간의 패배주의와 회의주의 그리고 보신주의를 조금씩 섞으면 파랑새 신드롬에 걸린다. 그런 사람들은 회사에 들어온 다음 전염병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쉬는 시간만 되면 밖에 담배 피러 나가 동료들에게 이 회사를 욕하고 다른 회사를 부러워하는 이야기를 한다. 뭔가 일이 안 풀리면 회사의 체제 욕을 하고, 상사 욕을 한다. 이런 이야기를 자꾸 듣다 보면 사람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든다. 전염된 것이다.
나에겐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왜 내게 애인이 없는지 모르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잘 관찰해 보자. 몇 분 안에 백 가지도 넘는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파랑새 신드롬에 걸리면 자신은 자각하기 어렵지만 남들은 비교적 쉽게 알 수 있다.
다양한 병원체
꼭 직장에 대해서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파랑새 신입사원, 파랑새 팀장, 파랑새 기획자, 파랑새 영업사원, ......
또 사람에 대해서만 파랑새 신드롬이 걸리는 게 아니다. 파랑새 언어, 파랑새 방법론, 파랑새 빌드 도구, 파랑새 프레임워크, ......
파랑새 언어를 좇는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그 사람에겐 주특기 언어가 없다. 딱히 내세울 언어가 없다. 다 고만고만하다. 이 언어 집적거리다가 보면 이런 단점이 보이고, 저 언어 집적거리다가 보면 속도가 맘에 안 들고, 주변에서 이 언어가 전망이 좋다고 하니 또 잠깐 입문서 깔짝대다가 하는 식이었다. 결국 파랑새 언어들 뒤꽁무니만 계속 좇아 다니면서 항상 불안하다. 이 언어가 맞나? 그 동안 파랑새 신드롬에 안 걸린 개발자는 자신이 쓰는 언어의 결을 따라 사용하려 연구하고, 자신이 이미 아는 언어들을 상보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빌드 도구도 그렇다. 주변에서 좋다고 해서 좀 공부해 보려고 했더니 화면이 맘에 안 든다. 그래서 다른 도구를 구해다가 공부했다. 하면서도 ‘아닌데 아닌데’ 싶다. 결국 최근에 새로 급부상하는 도구를 좀 만져본다. 가장 기본적인 기능만 세팅을 했는데 ‘아뿔싸, 거시기 기능이 지원되지 않는다네.’ 오늘도 또 파랑새 빌드 도구 찾으러 웹 서핑을 한참 했다. 그러는 동안, 파랑새 신드롬에 걸리지 않은 개발자는 기존에 팀원들이 쓰던 셸 스크립트와 파이썬 스크립트 좀 엮어서 간단하게 빌드 자동화를 했다.
지금 여기
켄트 벡(Kent Beck)의 익스트림 프로그래밍 2판 서문에 감동적인 글귀가 있다.
- 상황이 어떻건 간에 당신은 언제나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No matter the circumstance you can always improve).
- 당신은 언제나 자기 자신부터 개선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You can always start improving with yourself).
- 당신은 언제나 오늘부터 개선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You can always start improving today).
나는 이 글을 가끔씩 들춰보면서 몸과 마음을 추스리곤 한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많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시작할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시작하지 못하면 나중에도 안 될 확률이 높다.
우선은 쉽고 간단한 것부터 시작을 해보자. 또 남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보상을 주고 행복하게 만들면 어떨까.
작은 변화라고 너무 실망하지 말자. 때로는 작은 변화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큰 변화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매일 밤 10시가 넘어 집에 오느라 애 얼굴을 사진으로만 확인하는 처지라면 하루에 30분씩 일찍 집에 와서 아이가 자기 전에 30분이라도 놀아주면 어떨까. 아이 입장에서는 천지 차이가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은 물론이고 그 앞으로 오랫 동안.
하지만
하지만 마틴 파울러가 한 조언의 마지막 부분을 늘 잊지 말자. 직장을 옮긴다고 세상이 끝나지는 않는다. 정말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떠나라. 하지만 직장을 옮기되 파랑새를 찾으러 가지 말고, 만들러 가라. 나는 수년 전에 안전한 직장을 관둔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잘했다고 생각이 든다. 당시 아내가 한 말이 큰 위안이 되었다. "설마 우리가 길바닥에 나앉겠어? 때려쳐." 거창고 직업 선택 십계명의 아홉 번째 항목(부모나 아내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이 해당하지 않는 예인 듯 싶다.